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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 間 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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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Sun, 08 Jan 2012 21:09:40 GMT

 



여자는 열 정거장을 지나는 내내 예뻤다.

Sun, 08 Jan 2012 21:09:40 GMT

확률무엇이든 집단 속에 1/n의 확률로 분포되어 있는 것은 표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취할 확률이 높다. 채굴된 광물이 크면 클수록 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고 사냥을 오래, 많이 할수록 희귀한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높다. 표본의 수와 특정 개체의 수가 비례한다는 확률의 법칙은 지하철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와 마주칠 가능성 역시 비껴가지 않는다. 유독 지하철에서 이상형을 봤다는 이야기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허구한 날 지하철만 타고 다니니까. 차가 있다면? 글쎄. [...]



부디 그러하기를

Sun, 30 Jan 2011 13:30:37 GMT

  ‘이게 착각이었으면….’할 때가 있고 반대로 ‘이게 착각이 아니었으면….’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간사하다는 말이 썩 적절한 듯도 하다. 그렇다고 이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관성이 있다고 해야 맞다. 들꽃을 꺾어다 꽃점을 치는 것처럼, 단지 기원이나 소망과 같은 것이다. 감정이 생각을 짓누르면 역설적이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버릇처럼 현상의 원인을 찾으려 우왕좌왕하며 잡념 속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헤어 나올 구석이 없어 손을 휘적거리다 지푸라기랍시고 잡은 게 알고 보니 싱싱한 꽃 한 송이다. 그러면 그냥 바람에 한 점씩 흩날리도록 두면 될 터인데 그게 안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떼어낸 꽃잎을 애써 모른 체하며, 결국에는 손에 든 줄기마저 셈하는 궁색함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선택지 없는 점괘를 든 채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소망했다.

  이따금씩 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설 때, 우리는 스스로가 아닌 무언가에 의한 확신과 대답을 구한다. 그래서 사람은 종교를 갖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종교적이다. 누구나 초월적인 무언가에게 구원을 바랐던 경험을 갖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신으로 구체화할 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원하고 소망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꽤 흔하게 찾아온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게 고작 절망하지 않는 것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절망적인 일이다. 나는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일’에 스스로가 흔들리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간 성공적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허나 절망의 순환을 끊어낼 묘책 같은 것은 없었다. 그건 인간 두뇌의 초당 싸이클 한계치를 넘어서는 영역이었다. 이성과 논리로 모든 삶의 단면을 해독하는 일은 그저 자기방어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불어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술에서, 혹은 손끝에서 흘려보내기를 주저했었다. 창문 밖이 어둡지 않았다면 음악도시의 신파적 사랑이야기 같은 건 듣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껏 간드러질 수 있었던 건 밤 열 시부터 자정까지의 이소라의 목소리가 ‘난 행복해’라며 노래하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짙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감수성의 상실을 위무하는 일에 지쳐있을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균열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계 맺는 법을 알게 되었다. 완벽함이란 실은 무엇보다 불완전한 것이다. 거꾸로 불완전함이 어쩌면 완벽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성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인간성의 본질적 불완전함을 내포한 인간은 그 불완전함 때문에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다. 나는 그걸 좀 늦게 알았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첫인상을 물었다. 철 같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웃었지만, 맞다. 긁히는 일도 없고 부러지는 일은 더더욱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지간한 열기에는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나는 단단해지기만을, 불행해지지 않기만을 소망했다. 그것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이젠 완벽이란 모든 걸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결핍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안다. 단단해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고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지금은 예이츠와 노희경과 오렌지향이 있는 대학로의 어느 카페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그럼에도 애꿎은 들꽃을 꺾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계절이 끝나면 겨우내 내가 뜯어낸 꽃잎만큼 행복해 질 것을 믿는다. 부디 그러하기를 소망한다.




Intro in the Metro

Wed, 05 Jan 2011 16:35:57 GMT

  어느덧 여섯 번째 학기가 끝나가지만 학교 가는 길은 도무지 낭만적이지가 않다. 애써 감상적인 의미를 찾아보려 해도 사람들로 가득 찬 객차는 답답하고 불쾌하기만 하다. 출근 시간 방배역에서 열차의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이 밀려 나온다. 스펀지를 구겨서 상자에 넣으면 점점 부풀어 올라 상자를 비집고 나오듯이, 오전 8시의 지하철이 꼭 그렇다. 어느 변비약 광고가 떠오른다. 문득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똥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워의 지하철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령이 필요하다. 일단 열차를 기다리는 줄의 중간쯤에 선다. 맨 앞도 괜찮다. 꼴찌만 아니면 된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열차를 이용하실 승객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시면 된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열차의 문이 열리면 내려야 하는 세 사람을 위해 여섯 명이 따라 내린다. 승강장에 서있는 사람들과 길을 트기 위해 따라 내린 사람들이 얼마간 섞인다. 줄이 흐트러지면 따라 내린 사람 뒤에 바짝 붙는다.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열차에 타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탄 열차인데! 그들이 올라타면 문 바로 앞까지 밀려나온 구두들 사이에 발을 슬며시 집어넣을 수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배치가 흐트러져 한 두 사람 쯤 더 들어갈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늘구멍에 몸을 짓이겨 넣고 문이 닫힐 때 머리나 신발이 끼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문틀을 밀면서 버틴다. 여기까지만 하면 성공이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장을 푼다. 오늘 지각은 안 하겠다. 대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덜컹거리는 리듬에 맞춰 그저 똥처럼 흘러가면 된다. 

  메시지가 왔다고 울어대는 옆 사람 주머니 속의 핸드폰 진동을 느끼지 않아도 될 즈음, 숨을 몰아쉬어도 눈치가 안 보일 즈음이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사람이 안 보인다.) 다양한 군상을 마주한다. 나는 차창에 비춰진 객차 안을 둘러보곤 한다. 누군가가 신문을 읽다 짐칸에 올려두면 다음 역에서 탄 사람이 그 신문을 가져다 읽는다. 연재만화와 오늘의 운세를 보고 스도쿠 퍼즐을 찢은 다음 다시 올려둔다. 반으로 접힌 신문 뒤로 <혹시 당신의 양심을 두고 내리지는 않았습니까?>라는 공익광고가 보인다. 곧 이어 신문은 낡은 캡을 머리에 얹은 할아버지가 끌고 온 커다란 포대자루에 담긴다.

  20년 넘게 지하철을 타다보니 지하철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나름의 방법도 터득했다. 지하철에서 시간 보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지만 내가 주로 하는 것은 사람구경이다. 그런데 지하철에서는 함부로 시선을 둘 수가 없다. 자칫하면 강렬한 풀스윙 귀싸대기에 뱃살에 밀려 뜯긴 단추 마냥 날아가는 안경을 보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주로 시선이 머무는 곳은 신발이다. 문가에 기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신발을 훑어본다. 신발을 보면 적어도 그 신발의 주인이 옷차림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파악이라기보다는 상상에 더 가깝다. 이를 테면 코끝이 하얗게 갈라진 검은색 구두를 신은 직장인을 보고 입사할 때 그저 직장에 걸맞은 격식을 갖추기 위해 무난한 디자인, 적당한 가격이라는 기준에 맞게 구입했을 뿐, 수트나 구두 따위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라 판단하는 식이다. 서른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구두가 저렇다면 일은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겠다. 연애결혼보다는 맞선이 어울리지 않을라나.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위해 우직하게 살다 가끔 열일곱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그런 인생. 사직서를 가슴께에 품고 다니다 술 한 잔에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그런 인생.

 
상상 속 이야기가 그의 노후에까지 이르면 내릴 때가 된다. “This stop is….” 내리실 문은 오른쪽이다. 시원스레 밀려 나가는 사람들 역시 똥 같긴 마찬가지다. 개찰구를 밀고 나온다. 쾌변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위로에 대하여

Wed, 05 Jan 2011 16:24:28 GMT

  난 내 속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못된다. 그런 고로,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 상담을 원하거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그럴 능력도 없다. 내가 그네들의 고민과 고통을 나누고 감싸줄 만큼 이타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의 경험이 풍부한 것도, 어떤 말끔한 해결책을 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오늘처럼 갑작스레 누군가의 가슴이 무너져 내린 날, 그 순간을 함께한 이가 나일 때 꽤나 곤란해지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다.

  아니, 사실 곤란할 건 없다. 다만 마음이 불편하고 -지은 죄는 없지만- 조금 미안할 뿐이다. 위로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도 알지만, 내가 대신 해결해 줄 문제도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가만히 두기엔 분위기를 잠식하는 무력감을 서로가 견뎌내기 힘들다. 뭐, 결국엔 아무 말도 못했다. 내 경험에 충실하여, 가만히 놔두는 쪽을 택했다. 아마 그도 나에게 뭔가를 바란 것은 아닐 게다. 어차피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는 서툴고 가벼운 겉치레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상대도 나도 괴로운 그런 말은 안하느니만 못하잖나. 난 차라리 침묵을 고른 거다.

  위로의 힘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쿨한 척을 하지만 나도 사람 아닌가. 당연히 감정이 불안하고 우울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힘내.”, “괜찮아.”와 같은 빤한 위로라도 마음을 달래는 데에 얼마간 도움이 된다. 어릴 적에는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하는 그런 말들을 강박적으로 싫어했다. 세상에서 가식을 걷어내야 인간이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믿었고 때문에 다른 이의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일에 열성을 보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야 치유된다고 생각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때는 사람들의 정신적 방어력과 치유력을 고양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악역을 맡더라도 상관없다는 상당히 영웅적인 마인드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종의 폭력이었지만 난 모두가 그 정도의 따끔한 자극은 견뎌내고 일어서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내 스스로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경험한 뒤, 비로소 내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때서야 보잘 것 없는 위로의 말 한 마디도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위로에 서툴다. 감정을 보듬어달라는 듯한 눈빛을 읽을 때나 어두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듯한 말을 들을 때면 숨이 막힌다. 벙어리가 된다. 잘 될 거야, 괜찮아, 힘내 이런 짧은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 일이 힘겨워진다. 위로의 말을 듣는 일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사과를 하는 것은 용서를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테다. 같은 논리구조를 따른다면 타인에게 어두운 감정을 내비치는 것 또한 위로를 강요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위로는 어떤 의무감으로부터 비롯될 위험이 있다. 나는 바로 그 점을 경계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가끔은 외적 문제의 해결보다 내적 심리의 치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을 보면 신기하면서도 부럽다. 의무감을 걷어낸 위로란, 이성이 잠식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 자신에게조차 음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가을이 아프다

Tue, 16 Nov 2010 05:29:09 GMT

  가을이 되니까 아프다. 어깨도 결리고 무릎도 시리다. 뒷목에 담이 걸리질 않나, 편두통까지 재발해서 아스피린을 끼고 산다. 만성 비염은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인다. 손발이 계속 차가운 걸 보니 혈액순환도 잘 안 된다. 머리카락도 푸석해지고 폼 클렌징 손에 집히는 걸로 아무 거나 골라다 썼더니 여드름도 다시 슬슬 올라온다. 눈도 좀 침침하다. 방이 건조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노인네처럼 쇳소리 섞인 기침만 해댄다. 아니, 그보다 아예 아침에 일어나질 못한다. 만성피로다. 담배를 끊으라고? 그건 좀 무리다.   식욕이 왕성해지는 계절이 왔다. 나는 어쩐지 의욕이 사라졌다. 수업도 듣기 싫고 과제도 하기 싫고 발표준비도 하기 싫다. 책 읽는 것도 싫고 키보드 두들기는 것도 싫다. 모여서 빤하게 노는 것도 지겹고 심지어 MP3 인코딩하는 것도 귀찮다. 10년 지기한테 이런 얘기하면 왜 사냐고 빈정거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사는지 궁금해서 산다고 답한다. 아, 이런 음울하고 흉한 에너지는 다들 싫어하는데 큰일이다. 하여간 말이 살찌고 하늘은 높되, 내 머리 한 귀퉁이엔 다 식은 떡밥 같은 것들만 남았다.   가을은 고독이 잘근잘근 씹히는 계절이다. 노란 은행잎 쌓인 공원 산책길 옆, 어쩐지 반으로 접힌 타블로이드판 영자신문이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무 그루터기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런, 좀 병신 같지만 멋있는 남자를 위한 계절이다.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나이는 30대 초반, 왠지 모르게 직업은 전문직일 것 같다. 쌍팔년도 멜로 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차도남. 배경은 뉴욕이나 파리, 아니면 런던도 괜찮겠다. 요는 능력 있고 잘생겨야 한다. 젠장, 다니엘 헤니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어라,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배경은 서울이고 남자의 정체는 벨트 아래부터 허벅지 부분을 동그랗게 도려낸 바지를 즐겨 입는, 덜렁거리는 고환으로 영등포를 뒤흔들던 모 여고의 명물 바바리맨이었다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코트의 앞섶을 거침없이 열어 젖혔다지. 어느 날부터인가 조롱거리가 되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괴로워 소주로 남은 생을 마쳤다는, 그런 슬픈 전설이 남았다고.   독서의 계절이 또 가을 아니겠나. 술, 담배, 여자를 탐하면 뭔가 멋져 보이고 소설과 시를 읽으면 놀림 받던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의 H는 부끄러움을 몰라 야설을 탐독하곤 했다. 그의 배게 맡엔 언제나 300장 분량의 끈적한 소설이 11월 마로니에 공원의 낙엽처럼 쌓여있었다. 밤마다 한 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바탕화면의 휴지통을 가득 채웠다고. 그와는 달리 나는 문학소년이 아니었다. 가을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시를 읽고도 나는 그저 뻣뻣하기만 했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끄럽지 않겠나, 중얼거렸다. 영상매체 시대의 수혜자인 나는 시를 읽는 대신 영화를 봤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가 바뀔수록 짧아지는 가을이지만 여전히 그 명성에 걸맞게 하늘은 높다. 하늘이 높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보기엔 그저 유난히 푸를 뿐이다. 헌데 하늘이 높다니.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몰라도 참 근사한 말 아닌가.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뭔가 문학적인 냄새가 나지 않느냐, 이 말이다. 물론 가을하늘이 높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겠지만 난 문과라서 [...]



소통과 이해에 관한 뻘소리

Tue, 16 Nov 2010 05:27:48 GMT

가끔 남의 가슴 한켠을 후벼내어 무너뜨리면서까지 남을 이기려 드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어릴 적에 내가 그랬음에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 경우엔 내가 누구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보다 하찮은 누군가를 만들어냄으로써 제 스스로의 만족감을 챙기려 했던 것이다. 그래 내가 얘보단 좀 낫지, 와 같은 극도의 찌질함을 표현하는 뒤틀린 자위였다. 치부를 들춰냄으로써 얻는 자기만족이란 거 참으로 역겨운 건데 말야. 다른 사람들은 왜 그럴까나. 한 때 나는 진실된 세상을 꿈꾸며 내가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마냥 그렇게 위선을 폭로하고 다녔더랬다. 난 모두가 솔직한 세상이 오면 좀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갈수록 나와 사람들은 엇나갔다. 사람들이 착해서 그런지 나에게 대놓고 욕은 못 하는 대신 멀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러려니, 언젠가는 내 진심이 전달되리라, 너는 짖어라, 나는 내 갈 길 가련다. 이러고 살았다. 그게 아닌가 싶다. 4년 전 누군가가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작년에 누군가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소통이 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회의감을 밀어내려고만 했다. 이제는 자연으로 돌아간 지식인에게 얼마 전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정말일까. 정녕 그런 것일까. 경험에 반추한다면 도무지 반박할 여지가 없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이해했던 적이 있을까. 한 번이라도 누가 나를 이해했던 적이 있을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하겠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소통의 가능성을 믿었고 한 편으로는 지구 어디엔가 나를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으리라 믿었다. 이제는 확신이 없다. 근데 우리가 소통을 할 수 없다면 지금 우린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밤을 새면서 통화를 하고, 술기운을 핑계로 속내를 털어놓고, 메신저 창을 5~6개씩 띄워놓은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하는데, 소통과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걸까. '어느 정도'의 메세지 전달만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딱 그 정도로 만족하는 건가?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 쯤 해서 유명한 철학자의 이론이나 명구를 끌고 오면 좋겠는데 난 철학같은 건 하나도 몰라서 그런 건 못하겠다. "아무개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그런 거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대화는 계속된다. 메세지는 끊임없이 오고간다. 어제 먹은 사과가 맛있다는 사실은 전달할 수 있지만 사과의 맛은 전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란 불완전하다. 그림과 음악으로는 전달할 수 있을까? 그것도 힘들 것 같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과의 상큼함은 수신자의 기억으로부터 산출된다. A는 단지 A'로 전달된다. A'라는 메세지를 받은 수신자는 스스로 갖고 있는 B로부터 A'를 끌어낸다. 수신자는 그저 상큼함이라는 '언어'를 이해할 뿐 '상큼함' 그 자체는 이해할 수 [...]



프라다와 빠다 사이

Sat, 02 Oct 2010 11:56:45 GMT

악마는 빠다(PPADA)를 입을 수도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캡처 이미지 중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같은 디자인의 프라다 토트백을 하나는 로고가 그대로 박혀있는 상태로 올리고 하나는 로고를 제거한 뒤 올려서 각각의 게시물에 달리는 댓글을 캡처해놓은 사진이었다. 반응은 상이했다. 로고가 있는 사진에는 ‘너무 이뻐요.’, ‘이 가방 얼마죠?’, ‘모델명이 뭐에요?’ 등 갖갖이 상찬이 쏟아진 반면, 프라다를 제거한 사진에는 ‘ㄴㄴ’, ‘엄마 계모임 갈 때 들고 가는 것 같다.’, ‘사지 마시긔.’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캡처 자체가 명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기색이 역력하다. 해당 이미지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명품녀가 어쩌고 저쩌고, 된장녀가 이러쿵 저러쿵. 근데 사실 디자인에 있어서 로고의 존재 여부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작은 엠블럼 하나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온다. 하지만 위와 같은 극명하게 다른 반응이 미니멀리즘 디자인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가방에 붙어있는 로고가 P R A D A가 아닌 다른 활자였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보면 답은 쉽다. 아니면 로고를 제거하는 대신 다른 활자를 넣었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면, P P A D A 같은.  9월20일자 부산일보에 프라다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한 남성이 부인의 선물로 프라다 매장에서 가방을 구입했는데 로고가 잘못 찍혀있더라는 것이다. 프라다 측은 로고의 철자 하나 하나를 손으로 붙이다보니 이런 실수가 나왔다고 변명했다. 짝퉁도 그런 실수는 안 한다는데, 빠다(PPADA)제품을 169만원 주고 샀다는 생각을 해보면 사실 이런 코미디가 없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은 이 기사를 보더니 ‘이것이 바로 세계화와 노동유연화의 결과’라면서 ‘진품과 짝퉁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했다.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명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진짜’ 명품을 만드는 브랜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극소수의 상류층에 의해서만 소비되기에 이택광의 글이 주는 시사점과는 큰 관련이 없다. 그의 짤막한 글은 대중화된 명품을 바라보는 문제적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그것도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고객의 범위를 중산층으로까지 넓힌 명품(이택광의 문제의식이 조명하는)은 그것의 장인정신 때문에 소비되지 않았다. 명품을 구입하는 이유가 ‘품질이 좋아 오래 쓸 수 있어서’라면 100만 원짜리 가방이 만 원짜리 가방 100개만큼의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명품과 사치품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점부터 명품의 소비는 그 물건의 질quality과의 관련성을 잃었다. 대신 명품 그 자체가 가치value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나 노동의 유연화하고는 관계가 없다.    Louis Vuitton in china  한 인터넷 중고명품거래 사이트 게시판에 루이비통 공장이 중국에도 있다는 요지의 글이 올라왔다. 루이비통 매장에서 제품을 사고 집에 와 확인해 보니 라벨에 made in china라고 적혀있더란다. 놀란 글쓴이는 백화점에 전화를 걸었고 직원으로부터 “그 라인은 중국에서 생산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댓글에서 굉장히 흥[...]



촌철의 미학

Thu, 23 Sep 2010 06:21:43 G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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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지식인과 대중에 관한 소론

Fri, 30 Jul 2010 15:04:28 GMT

신이 사고체계의 중심이었던 시대를 전근대라고 한다면 당대의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국가를 통치하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신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던 성직자였을 것이다. 그 당시 지식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을까. 추측컨대 당대의 지식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었을까 한다. 민중은 상류층이 습득할만한 지식을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봉건적 지배구조 아래에서 민중은 그저 수동적인 개체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중이 지식을 접하기도 쉽지 않았다. 생업에 몰두하는 일 자체도 버거웠을 테지만 책을 구하기나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지식의 계급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분제의 폐쇄성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거꾸로 계층구조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지식인과 민중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계몽주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부터라고 본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주체는 인간 스스로이며 또한 그 근본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성이다.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말은 본래 어두운 방 안에 전구light를 켜듯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깨운다는 의미이다. 전근대적, 넓게는 구시대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민중의 이성을 깨우려는 지식인들을 계몽적 지식인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헌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계몽이라는 말은 의미가 확대되어 교육과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계몽이라는 단어를 정의한다면 ‘지식수준이 낮거나 전통적인 인습에 젖어 있는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계몽적 지식인이라는 말의 의미도 ‘이성을 깨우는 자’에서 ‘가르쳐서 깨우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계몽적 지식인에 대한 성토가 등장했다. 계몽적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를 살펴보면 지식인은 가르치는 주체이고 지식인층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관념적이고 고고한 권위적 지식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과 인간의 변화,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소통이 없는 일방적인 관계가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들과 대조되는 새로운 지식인상-이를테면 실천적 지식인과 같은-이 요구되었다. 헌데 새로운 지식인상을 논하기 전에 과연 계몽적 지식인이 비판의 대상인지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지식인은 무엇이며 지식인의 계몽성은 또 무엇인가.    지식인이란 지식노동에 종사하는 사회계층을 일컫는다. 지식노동을 다른 말로 지적 콘텐츠의 생산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식이라는 말이 너무나 광범위하다. 지식인 계급과 지식인이 아닌 계급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노동계급 상에서 지식인을 위치시킬 수 있는 곳은 두 가지다. 육체노동계급, 즉 블루칼라Blue Collar와 구별되는 화이트칼라White Collar를 통틀어 지식노동계급이라 볼 수도 있고, 화이트칼라의 상위개념인 골든칼라Golden Collar로 따로 분류할 수도 있다. 허나 사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경계 긋기가 어렵다. 육체노동 종사자 역시 해[...]



채식주의

Mon, 12 Jul 2010 15:32:36 GMT

  몇 주 전, 누군가가 고양이를 패 죽여 아파트에서 던져버린 사건이 화제가 되었었다. 이 사건은 어이없게도 채식주의자와 육식옹호론자들의 사이의 논쟁으로 번져나갔다. 극악한 환경에서 자란 동물의 고기는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서 고양이의 죽음에는 분노하는 것이 위선이라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한국의 거의 모든 논쟁이 그렇듯 보기 참 안쓰럽다. 이 문제를 육식 vs 反육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우왕좌왕하는 거고 난독증 쩌는 병신들이 양산되는 거다. 핵심은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자세다.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할까. 목축과 사육은 근본적으로 동물의 본성에 위배되는, 그저 인간을 위한 시스템이다. 요컨대, 난 ‘윤리적 사육’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육 자체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애완동물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기르는 것은 이미 동물을 인간의 하위 개체쯤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애완동물을 위한다는 행위는 사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정확히는 동물의 지배자(주인)로서 인간의 만족감을 위한 것이다. 식탁에 올라가는 닭의 운명은 동정하면서 제 애완견의 화학적 거세에는 주저함이 없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서글픈 혼란이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채식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가 은폐하는 문제들이다. 기아문제가 대표적인데, 난 채식으로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동물이 먹는 곡물을 사람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주장에는 동물들이 그토록 극악한 환경에서 도축당하는 이유에 대한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축의 비육이 근절되어 잉여자원이 된 곡물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지구의 거의 모든 재화가 그렇듯 곡물 또한 자본의 손아귀에 있다. 제 3 세계의 식량 주권이 박탈당한지 오래인 현실에서 동물의 먹이로 사용되던 곡물이 굶주리는 이들의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이 무슨 순진한 발상이란 말인가.

  이 시스템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육식을 위한 욕심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욕심이다. 가축의 비육이 비윤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고 동물의 먹이가 인간의 식량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곡물을 인간에게 먹이는 것보다 동물에게 먹이는 것이 더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채식주의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윤리적으로 사육당해 도축된 육류조차 먹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채식주의는 한낱 공허한 원칙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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