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scribe: 민노씨.네
http://minoci.net/rss
Added By: Feedage Forager Feedage Grade B rated
Language: Korean
Tags:
가장  같다      그런  그리고  나는  수 있는    아주  어떤    있는  있다  하는  하지만 
Rate this Feed
Rating: 1 starRate this feedRate this feedRate this feedRate this feed
Rate this feed 1 starRate this feed 2 starRate this feed 3 starRate this feed 4 starRate this feed 5 star

Comments (0)

Feed Details and Statistics Feed Statistics
Preview: 민노씨.네

민노씨.네



온라인 실존, 속물근성, 그리고 커피캬라멜에 대한 이야기...



Published: Sat, 11 Nov 2017 22:03:10 +0900

 



독자, 필자 그리고 편집자

Tue, 06 Sep 2016 09:22:21 +0900

편집자는 필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가교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징검다리를 놓는 일로 충분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큰 강을 건널 나룻배가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그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필자(원고)를 있는 그대로 독자께 전하는 일이 편집자의 일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슬로우뉴스는 다양한 철학과 지향을 가진 동인들의 협의체입니다. 슬로우뉴스 안에는, 비유하면, 뜨거운 물도 있고, 아주 차가운 물도 있습니다. 편집 방향과 색깔은 대개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이 섞여 미지근한 물이 되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독자들이 마시기에는 가장 적당한 온도의 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시원함을 찾거나 뜨거움을 찾는 독자에게는 시원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이었겠죠.
저는 최근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라는 글을 편집했습니다. 초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저는 뜨거운 물이었고, 또 어떤 편집위원은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초기 검토 과정을 거친 뒤에 제가 최종적으로 글을 편집하게 됐습니다. 두 부분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1. 하나는 글 서두에 나오는 "페이스북-혁명가"라는 조롱투 표현
2. 나머지 하나는 글 말미에 등장하는 "메갈"에 관한 논평이었습니다.
사전에 필자와 협의해 이 두 부분을 편집(이 경우에는 삭제)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원문 그대로 발행했고, 지금 와서 다시 숙고하면, 필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이롭지 않은, 필자와 독자의 간격을 더욱 멀어지게 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라는 글이 가지는 주된 가치를 한국사회의 문화적 편협함과 집단주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타산지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소 도취적이고, 과도한 표현 혹은 민망하거나 독자에 따라서는 폭력적일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문화적 상대성과 다양성, 무엇보다 관용주의를 강조하는 테마의 글에서 필자의 개성으로 존중하려고 했고, 이를 가급적 살리려고 했습니다.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를 비판하는, 현저히 눈에 보이는 독자들의 반응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편집팀원들과 대화했고, 비판을 주신 독자(슬로우뉴스필자이기도 한)와 대화했고, 또 무엇보다 글을 쓴 필자와 대화했습니다. 제가 신뢰하는 많은 이들께 조언을 구했고, 이 대화는 족히 10시간을 넘습니다. 결과적으로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려 심도 있게 논의했고,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를 보강하는 선에서 독자의 비판적 지적에 답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필자가 경험한 베를린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주의에 관해 서술한 글입니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몇몇 분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수의견으로 매도됐던 필자의 경험 등이 그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최종 발행이 됐습니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토론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결과로만 보면 대여섯 줄의 편집자 주를 쓰기 위해 많은 분들께서 진심을 다해 고성이 오가고, 또 때로는 감정적인 불편을 느낄 정도로 대화했고, 토론했습니다. 그야말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슬로우뉴스의 방법론이고, 철학이며, 필자와 독자를 모두 동등하게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글에 비판적인 독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쉬움은 다양한 "반론 기고"로 풀어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는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를 쓴 필자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위대한 정신은 숭배받기보다는 비판받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길 바라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누군가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저도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론 치열하게 비판하고, 반대하며,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대화가 담기고, 누구나 자신의 체험을 당사자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그저 나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런 집단 지성의 정원으로 슬로우뉴스가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긴 넋두리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슬로우뉴스 편집장 민노

*메모. 슬로우뉴스 페이스북 페이지(2016년 7월 21일)에 쓴 글 옮김.



마음빵 돈빵 몸빵

Sat, 19 Apr 2014 23:06:35 +0900

1. 마음빵: 이성복 식으로 말하면 "무력한 기도의 방식"이랄까. 형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대개의 경우에 무익하거나 영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마음이 없다면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무시할수만은 없는 노릇. 그리고 마음이 없는 몸은 강요 혹은 가식이라서 지속하기 어렵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 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 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 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 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중에서


마음빵의 유사 대체재: 온라인에서 아주 아주 간단한 수동적인 의견 보태기 혹은 SNS에서의 공유... 이들이 대체로 지적 만족/정의감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는 지적은 대체로 현재의 소셜미디어 환경에서는 아주 유의해서 고찰해야 하는 지적이다.
(image)
(image)

2. 돈빵: 대개 몸빵의 대체재로서 큰 효과가 있다.

3. 몸빵: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마음빵 돈빵 몸빵 중에 그 중 제일은 몸빵이라....



선입견, 요나 그리고 익명성

Fri, 11 Apr 2014 01:18:17 +0900

1.
선입견은 고정관념이다. 어떤 대상에 관하여 이미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정형화한 생각을 선입견 혹은 선입관이라고 한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함', '한 편에 치우신 생각'이라는 의미를 품는다는 점에서 선입견과는 다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서로 다른 영토에 속한다.

가령, 비싼 외제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어떤 이쁜 여자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어떤 배나온 중년 아저씨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거리에서 바라본다면, 그 여자와 남자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만든 거대한 덫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2.
우리는 이미 98%쯤은 결정된 존재다. 우리는 선입견의 포로다. 이건 거의 확정적이다. 어떤 A라는 사람을 B라는 사람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다르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A 혹은 B와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것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나라, 그들의 피부색, 그들이 태어난 시기, 그들이 자라온 곳, 그들의 부모와 형제, 그들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지능과 체력. 그들의 눈동자와 눈썹, 머리카락. 이건 그들(A와 B)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선택할 수 없고, 그들의 의지와 실천으로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의느님이라면? 아, 의느님이야말로 창조주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좆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나는 무슨 원빈처럼 안 생기고 싶어서 이렇게 생긴 줄 알아?

3.
이렇게 선입견의 포로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는 나 아니라니깐. 그 자기 부정은 자기를 둘러싼 결정된 것들을 깨뜨린다. 나는 나 아니고, 우리 부모는 우리 부모가 아니고, 내 형제자매는 내 형제자매가 아니다. 나는 사실은 저 부자집의 숨겨진 자식 혹은 외계에서 온 수퍼히어로일거야. 그 거짓말을 사람들은 소설, 이야기, 픽션이라고 부른다.

바슐라르는 소설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 아닌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이어서, 나는 나 아닌 것들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의 나라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들을 성서 속 인물인 '요나'에 비유해 소설의 기원을 '요나 컴플렉스'로 설명한다.

4.
누군가과 존재와 존재로서 만난다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 존재를 전인격적인 실존이라고 말한다면 만남의 불가능성 역시 확정적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이미 결정된 존재들이고, 그렇게 이미 거의 전부가 이미 만들어져서 온갖 선입견의 덫들에 걸려 버린 불쌍한 짐승에 불과하다.

5.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실로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한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만날 수 있는 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다. 불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눈동자를 그 피부색을 그 머리카락과 그 성별을 그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 그 곳에서 우리는 겨우 겨우 스스로의 존재에 관해 조금은 솔직하게 그 선입견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6.
그런 완벽한 어둠에 가장 가까운 '요나의 바다', 미디어적으로 그 요나의 바다에 가장 가까운 게 블로그였다. 선입견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한 공간은 인터넷이었으니까. 거기에선 누구나 쉽게 하나의 새로운 이름(아이디)를 통해 전자전기신호들을 공평하게 부여받을 수 있었으니까. 블로그의 익명성은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요나들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익명의 깊은 어둠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7.
물론 여기에는 언어적인 한계가 자리한다. 그리고 언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면서, 그 자체로 토대이므로(상부구조가 아니라), 한 존재를 다시 규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20세기 말에 남한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 동물성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인터넷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월드와이드웹, 특히 협의의 미디어로서 블로그였다.

8.
블로그라는 요나의 바다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그 시기는 짧았다. 그 안에서도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또 다시 장사꾼의 호객행위가 생겨났으며, 병신 같은 일등놀이가 태어났다. 그건 인간이라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고, 동시에 희극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불안과 한계를 잊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참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인간의 속성이긴 하다. 참으로, 참으로 안쓰럽도다.

9.
글이 인격을 반영한다면, 동시에 그 인격의 기만 역시 반영한다. 글이 진실을 반영한다면, 그 진실이 숨어 있는 거짓 역시 반영한다. 사람들은 흔히 익명성을 거짓, 어둠, 투명하지 못한 어떤 것의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건 마치 현실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껍데기, 그 표시, 그 투명함, 그 물질성이 갖는 기만과 거짓의 알리바이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거짓은 익명의 가치를 불길하고, 음산하며, 타락한 존재의 조건으로 이미지화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언술화했다).

0.
얼굴. 내가 원래 말하고 싶었던 건 얼굴이다. 얼굴만큼 기만적인 선입견의 도구는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면(익명성)을 거짓으로 선포한다. 얼굴이야 말로 거짓이다. 이건 정말 확정적으로 자명하다.



"그것 봐 내가 그럴줄 알았어!"

Wed, 04 Sep 2013 16:04:57 +0900

이석기 사태 단상.

심정적으로야 나도 이런 황당한 사건을 접하면 일단 까고 보자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발동한다. (그래 이석기 사태 얘기하는 거다) 나는 영어 졸 못하지만, 헐리웃 영화 보면 '아이 뉴 잇'하면서 아주 도끼눈 뜨면서 대사를 읊는 배우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남편이 바람 피우거나 거짓말이 들통나면 대사 작렬.

이석기 일당에 대해 '아이뉴잇'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렇다면 왜 막지 못했나. 적어도 왜 그 상종할 수 없는 일당과 영합했나. 현재 스코어 이석기 일당은 시대착오적인 똘아이들이고, 이에 대해 이석기 일당은 제대로 된 반박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아이뉴잇'하면서 도끼눈을 부라리는 그 인간들이 나는 더 짜증난달까.

1. 민주당 하는 짓을 보면 창조적인 정책 입안 능력은 고사하고, 그 흔한 정치적 선동의 프레임도 자기 걸로는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정치적 식물 집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은 늘 적대적 공생의 메카니즘에서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반대(하는 척 하면서) (결국)(편승)하면서 기생하는 정당 같다.

2. 이석기 일당의 행위는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 혹은 강하게 신뢰할 수 있는 추정적 정황으로 보건대) 범 진보권에서 표현의 자유를 들어 "너는 존나 싫은데, 니가 니 사상의 자유를 공격당하면 내 너를 함께 싸워주마"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엄청 똘아이의 엄청 거대한 해프닝인데, 그 똘아이들의 수장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라는 점과 그를 수장으로 삼은 집단이 (소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데.....

3. 그러니까 '내란음모'는 정치적 선동의 프레임에서 아주 크게 베팅한 것 같고(물론 이런 베팅은 올인해야 정상이긴 하다), 아주 과하다고 본다. 한상희 교수 의견처럼 소요죄 정도가 논의될 상황인데, 소요죄는 예비/음모를 처벌하는 조항이 없지 않나? 그럼 무죄? 형법상으론 무죄로 처리해야 맞다 보고. 범죄(조항) 없으면 처벌 없는거지 뭐. 다만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하면 족하지 않나 싶다.

4. 정치적 보복은 오직 국민의 선거를 통해서만 행해져야 한다. 적어도 이석기 히든카드는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함정수사'(?)라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5. 초원복집 사태에서 민주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했던 자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는 이 엄혹한 시절에 부산 시민들이 그 민주주의를 부정했던 자가 옹립하고자 했던 영삼 할배를 대통령 만든 것처럼, 적어도 진보라면 이석기 사태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촛불을 더욱 크게 타오르게 하는 '기름'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끝)

추.
블로깅 역사상 최초로 페북에 먼저 쓰고, 블로그에 옮긴다. 나도 페북의 자발적 포로가 되어가는 거딘가? 심각하게 스스로 초라함을 느낀다.



나는 너에게 매맞고 싶지 않다

Wed, 24 Jul 2013 10:02:41 +0900

* 발아점(發芽點): 포털 뉴스 담당자에게 듣는다 5: 편집권에 관한 고민과 전망

"포털들은 광우병 시위를 비롯해 사회의 크고 작은 사태와 소동의 발화점(發火點) 노릇을 해 왔다. 그런데도 이런 탈선을 걸러내거나 피해를 구제할 장치도 없다" (조선일보 2013년 7월 5일 자 사설)

1. 언론 사설이라기 보다는 무슨 근엄한 집안 어른의 목소리 같다. 혹은 무슨 박정희 시대의 경찰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참 놀고 있다.

2. "광우병 시위를 비롯한 사회의 크고 작은 사태와 소동"은 그 자체로 "탈선"이 아니며, 그 사태와 소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탈선이라면 '선'을 정하는 건 누구인가? 그것은 언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 소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대화과 토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언론은 '정답'을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주고, 그 대화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그런 점에서, 일은 정말 열심히 한다고 하던데, 언론으로서의 철학을 논할 수 없을만큼 오만하고, 독단적이다.

3. 이런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이라고 광고하는 이 사회는 매맞고 싶은 사람들이 주인(?)인 그런 민주주의 사회인건가? 그런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고마해라, 많이 맞았다 아이가!"

4. 발아점인 '포털 뉴스 담당자 인터뷰 정리'는 아주 뜻깊은 시도다. 물론 이 쪽으로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대개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긴 하다. 그럼에도 포털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살아 있는 사람', 때론 분노하고, 때로는 열변을 토하는 그런 목소리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자료로서는 그 어떤 감동적인 칼럼이나 그 어떤 풍부한 비평보다도 값지다. 5회의 마지막 연재인 이번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언론이란 건 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아갈 방향을 설계해 나가는 논의의 장이다. 그 각축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공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갈등이 중요하다. 객관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주관이 중요하다.”

언론의 객관성이라던가, 불편부당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맥락이다("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언론이 순결하고 투명한 하얀 도화지 같은 것이라거나, 혹은 사실만을 전달하는 무생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언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언론을 사회의 공기라고 하는 이유라 믿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조차도 충분히 존중할만하다. 하지만 세상에 온전하게 객관인 사실도 그 사실에 관한 평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합리적인 주관"을 통해 이 세계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대화'할 따름이다.

5. 가령 기사투 글쓰기의 관습적인 행태 중 하나인 "나"의 생략을 생각해보자. 글을 쓰는 기자는 실존의 인간이다. 그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취재원의 목소리를 균형감 있게 배치하고, 아무리 깊이 고민해 사안을 다루더라도 그 인간 자체가 하나의 관극적인 틀에 불과한 것이다. "합리적인 주관"을 가진 인간과 객관적인 척 하는 세계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저널리즘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많은 저널리즘의 철학적이거나 기술적 발전들이 녹아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를 지운다고 해서 기사에서 그 "주관"이 거세되거나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모든 언론들은 다들 저마다 주관적이다. 다만 객관과 실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격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일보의 격은 술취한 가부장 혹은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의 그것이다. 나는 취객이나 폭력 경찰을 언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직장의 신' 단상

Tue, 28 May 2013 12:18:46 +0900

1. 김삼순 업글 버전: 비현실적인 여주인공이 현실적인 상황을 신데렐라 풍으로 극복(?)한다는 김삼순의 구도와 유사하다. 그런데 사회적 의제로서 '비정규직'을 소재로 끌어온 점에서는 김삼순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김삼순의 비현실성을 극단으로 몰아붙였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극적인 요소로서의 캐릭터의 과장이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다소 황당하기도 하다. (자격증이 너무 많고, 대한은행 화재사고 이후 만 5년 남짓동안 그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건 불가능하다...;;; )

2. 김혜수는 연기도 외모도 아주 매력적이다. 캐릭터 설정도 꽤 잘한 것 같다. 로맨틱코믹이 어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고, 어쩌면 영화보다는 TV드라마에 더 적절했 을수도...

3. 오지호는 자신이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캐스팅 아주 잘했다). 잘난 것 같지만 어딘가 부족한 역할인데, 실제 오지호의 이미지와 아주 부합한다. 오지호는 배우로서는 약점이 있다. 너무 잘생겼다. 그게 원빈이나 장동건처럼 잘생긴 것도 아닌 게 너무 이국적으로 잘 생겼다. 그리고 뭔가 비어 있고, 가벼운 느낌으로 이미지가 축적된 느낌이다. 하지만 [직장의 신]에서는 그런 느낌이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린다.

4. 무대리(배우 이름 모름)의 연기는 아주 훌륭하다. 극중 캐릭터 해석이 아주 탁월한 듯. 표정, 특히 눈빛이 좋고, 발성과 호흡도 아주 좋다. 하지만 만년 과장(배우 이름 모름) 연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작정하고 비현실적인 코미디, 그러니 과장된 코미디를 보면서 울컥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연기를 잘한다는 거고, 극중 설득력이 아주 높다는 방증이다.

5. 정유미는 이런 캐릭터로 고정될 위험이 느껴지고, 전혜빈은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서로 맞바꿔 설정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유미를 부잣집 딸로, 전혜빈을 부산에서 상경한 지방대 출신으로. 물론 극중 비중으로 보면 정유미(의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더 높기 때문에)가 비중있는 조연이라면, 전혜빈은 비중이 낮은 조연이다.

6. 초반 꽁트와 나레이션 효과는 아주 훌륭하다.

7. 중간 중간 반복적인 주제곡의 사용은 다소 과한 것 같다.

8. 효과음은 (아주 효과적인데) 과연 저작권을 다 처리했을지 의문이다. 앵그리버드까지 등장하는데... 암튼 웃겼다.

* 우연히 한 편을 봤다가, 재밌어서, 나중에 몰아서 정주행.



테이크 쉘터: 블루칼라 가부장에게 불어온 폭풍

Mon, 22 Apr 2013 01:01:30 +0900

* 관람일시/장소: 2013년 4월 8일 스폰지하우스 언론시사회

** 스포일러 주의: 독자에 따라 약한 스포일러~다소 강한 스포일러 사이.

*** 원래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하려고 쓴 초안인데, 퇴고/편집하지 않고 있다가 영화가 개봉하는 바람에 일단 여기에 올림. ㅡ.ㅡ; 퇴고/보충해서 슬로우뉴스에 발행할 수도 있지만... 편집팀에게 까일 수도 있다... ㅎㅎ



1.

이미지 그 자체가 유일한 스펙터클인 영화가 있다. 이야기로 보자면 [디워]보다 그다지 나을 것 없는 [트렌스포머]류의 황홀한 스펙터클 신파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미지로서의 영화, 그 본질을 거부하는 듯 이야기 그 자체가 중요한 영화가 있다. 이창동 영화는 이야기가 이미지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의미론적 서사구조가 이미지 자체의 구성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때론 이미지가 이야기의 극적인 흐름을 쫓지 못할만큼 완성도 높고, 깊이있는 사유와 고민의 흔적들을 그 내러티브의 틈 속에 담아내곤 했다.

이미지와 이야기가 삼투하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영화들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영화들, 스탠리 큐브릭의 모든 영화들은 이야기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 그 자체가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이미지와 이야기의 의도적인 배반들, 엇갈림을 직조하는 영화들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전통에 있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 결국은 영화를 또 다른 언어로 밀어붙인 고다르의 실험적인 영화들이 그렇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테이크 쉘터]가 여기에 속한다.

2.
[테이크 쉘터]는 그 단조로운 이야기, 그 단조로운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아주 야심찬 드라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국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배반하며 영겁회귀하는 비극적 뫼비우스의 띠를 완성하는데 이른다.

질문은 단순하다.

1. 왜 마이클 쉐넌은 정신병적인 망상(폭풍)에 시달리는가.

2. 시스템의 결과인 이 파멸적인 묵시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3. 프로테스탄트 윤리 위에 성립한 미국자본주의에 과연 구원은 가능한가.

4. 사랑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가부장이 잔존하는 기독 내러티브의 기만적인 속임수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가 끝끝내 기댈 수 있는 건 가족주의와 결합한 사랑이라는 신화뿐인가.

5. 미친 블루칼라 가부장은 어떻게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미션은 성공했는가.

이 영화의 뛰어남은 이들 질문에 대해 관객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시각적으로 그리고 이야기로서도 비교적 명확한 이 영화는 놀랍게도 서로를 배반한다.




---- 여기서부터 (독자에 따라) 강한 스포일러























마지막 장면에서 쉐넌의 광기가 실현된다. 마치 잔다르크의 소명처럼 쉐넌의 광기는 거대한 회오리 폭풍의 출현을 통해 치유된다. 그는 이제 광인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선지자다. 부당하게 공격당하고, 가혹하게 상처받은 쉐넌의 영혼은 이제 저 거대한 폭풍을 통해 구원받은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처럼, [쉘터]의 결론은 두 가지 점에서 쉘터, 피난처로서의 구원을 포기해버린다.

체스테인에 의해 쉐넌은 인간의 길, 선택의 길, 치유의 길로 이끌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쉘터를 짓느라 멀리 여행할 돈이 부족해, 인근으로 떠났을 휴가지에서의 폭풍은 신의 길,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구조의 공간, 자연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제시된다.

쉐넌을 선지자로 본 관객은 이 재앙에 환호할 것이다. 쉐넌을 연약한 인간, 상처받고 불안한 직장에서 철저히 소외받는 블루칼러 가부장으로 감정이입한 관객들은 어쩌면 절망할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둘 모두이다.

추.
연기는 정말 뛰어나다. 쉐넌과 체스테인의 빈번한 클로즈업은 이런 훌륭한 배우들 덕분에 그 효과를 충분히 배가한다.

마스터 내러티브는 [현대인의 소외] 정도 되려나?

왜소한 인간과 거대한 자연의 대비, 실존적 인간의 선택과 필연적인 (시스템의) 인과율 혹은 신화(로서의 자본주의)의 대비는 시각적으로도 아주 적절하게 묘사된다.

마지막 질문.
왜 기름비인가?




선관위의 사전 투표제도 도입 설명회 참석 후기

Fri, 05 Apr 2013 08:45:58 +0900

그저께(4월 3일) 중앙선관위가 주최한 간담회에 다녀왔다.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거 5일전 이틀간 부재자(라기 보다는 ‘사전 투표’에 가까운 개념인 듯) 투표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선관위 시스템 전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있으니까 제발 좀 불신만 하지 말고 믿어달라는 것.

간담회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인 선관위의 발표를 ‘구경’하다 온 자리였다. 다만 선관위 직원들과 솔직담백하게 짧게나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보람이었다.

발표 내내 선관위의 피해의식은 역력했다. 그 피해의식은 "세계 최고의 시스템", "세계 최초의 제도" 따위의 최고형 수사를 보상적으로 이끌어내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내용인 선관위의 D-5 사전투표 제도는 당연히 환영할만하다. 이번 재보궐선거에서는 시범 운영하고, 2014년에 확대 시행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 왜 D-5에서 이틀간인가? 5일 내내일수도 있고, D-2에서 정식 투표일까지일 수도 있는데.
- 해당 선거구로 우편 송부하는 기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 가령 안양이 선거구인데 부산에 출장 가 있는 동안에 투표했다고 치자. 부산에서 안양까지 송부할 시간여유가 필요하다.

정치적으로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구도를 가진 감정적인 정치과잉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의 패배는 인정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왜곡된 환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희생양 제의는 모든 정치의 역사에서 존재해왔다. 그러니까 선관위는 억울해도 더 투명하게, 더 솔직하게를 강조하고, 실천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니까 선관위의 다소 억울한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징징거리는 모습까지 이뻐보일 리 만무하다. 어쩔 수 없다. 계속 투명한 기구와 투명한 절차,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정치적 패배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극히 일부 시민들의 음모론을 탓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지 고민하고, 좀 더 열린 정보, 좀 더 투명한 절차를 실현할 있도록 머리를 짜내야 한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 그게 선관위의 의무고, 그게 공무원의 의무다.

한국 선거 제도와 그 선거를 치워내는 시스템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들 한다. 선관위 직원들은 아주 지랑스럽게 그 점을 강조한다. 앞으로는 그 시스템을 수출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리라. 하지만 물리적인 시스템, 형식적 얼개로서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아무리 세계 최고이면 뭘 하나. 정치 자체가 세계 최악인 걸. 그래서 선관위는 어쩌면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초래한 혐오와 불신을 대신 짊어진 희생양처럼 보이기는 한다. 무슨 일만 나면 ‘이게 다 북한 소행’이라는 그 SF적인 정치적 프레임을 가진 위대한 대한민국에서 다소 부당하게 대신 띵 뜯기기고 대신 욕 처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하나다. 희생양이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선거가 국민의 축제일수 있도록 제도를 고민하고, 시스템을 고민하는 일. 그게 선관위가 계속해서 해야 하는, 선관위의 일이다. 다른 징징거림은 이미 충분히 족하다고 본다. 




슬로우뉴스 후기: 박근혜와 불량식품

Mon, 25 Feb 2013 18:19:00 +0900

앞으로는 종종, 가급적이면 자주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한 칼럼/기사에 대해 후기를 작성할 요량.
박근혜와 불량식품 http://slownews.kr/7953 

1. 발아점
주낙현 신부님 http://viamedia.or.kr 과의 대화에서 비롯한 글이다. 대선 직후인가 오랜만에 스카이프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무심결에 ‘박근혜의 불량식품’을 맘껏 조롱했다. 그런데 신부님은 그런 태도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 시각으로는 진보라고 스스로 부르는 세력이 다시 보수라고 불리는 기득권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막장드라마
이 칼럼(이라기 보다는 잡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은 ‘막장드라마’ 부분이다. 나는 앞으로 막장드라마에 관해 정말 긴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 가급적이면 책으로 내보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다. 현실기만적 판타지로서의 막장드라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체를 가장 명징하게 상징한다. 그것은 정치보다 정치적이고, 경제보다 경제적이며, 자본보다 자본적이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욕망을 너무도 무식하게, 너무도 탐스럽게 표상한다.

3. 유교적 가부장의 통치 기제
이해관 KT새노조 위원장과 2MB18nomA님의 대담을 기획했다. 두 번에 걸쳐서 만나뵈었는데, 거기에서 중심테마 중 하나가 박근혜 시대 준비하기(내가 스스로 명명하기로는 박근혜 시대 10배 즐기기). 나는 박근혜 통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지만(그러니 정말 심각하게 정치적 무관심에 이끌리지만), 그래도 어쨌든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우려하는 건 정말이지 박정희 식 유교적 가부장의 통치 기제를 활용할 가능성이다. 그 세계에서는 폭압적 인권 유린이 법질서로 둔갑하고, 인격 침해적 폭언이 어른의 교훈적인 말씀으로 둔갑한다.




단상: 세계는 이미 광고가 되어버렸다

Mon, 04 Feb 2013 13:31:03 +0900

http://www.youtube.com/all_comments?v=XwNjGU8AtNQ

1. 심하게 중독적인 음악. 모든 예술은 말초적인 성격을 가진다. 특히 춤과 음악이 그런 듯. 그런 말초성, 즉흥성, 반응적 동물로서의 감각에 아주 충실한 요즘 트랜드(?)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완전 신난다. (나 완전 삼성 싫어한다...그런데 나 동물이다)

2. 스토리/내러티브/플롯: 마스터 내러티브는 신데렐라 스토리다. 여기에 패러디(싸이, 관광버스)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한 상징으로서 미국의 클럽 이미지가 잘 짜여진 플롯에 섞인다. 포스트모던시대의 대중문화적 특질로 이야기되는 패러디/혼성모방... 형식 실험의 종말에 적합한 또 하나의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3. 정성일은 '언젠가 세계는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패러디해보자. 세계는 이미 광고가 되어버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과 나의 욕망은 이미 광고가 삼켜버렸다.



버지니아 울프와 [자기 혼자만의 방]

Thu, 10 Jan 2013 08:15:04 +0900

#. 2006년 3월에 한겨레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거기있던 글은 예외적으로 남기고 여기에 옮긴다. 옮기는 이유는 슬로우뉴스 보충자료 용도. 그리고 퍼머링크 옮기기.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1882. 1. 25 ~ 1941. 3. 28(조지 찰스 베레스포드, 1902) 1. 울프와 베이유시몬느 베이유가 내게 있어 정치적 지향, 사회적인 이상(理想)을 상징하는 여성이라면,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문학적인 이상을 상징하는 여성이다. 굳이 내게 그 둘의 차이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베이유가 뜨겁고 부드럽다면 울프는 차갑고 단단하다. 내 마음의 풍경 속에서 그 둘의 차이는 그렇게 표상되고 있다. 그런데 실은 나는 잘 모른다. 모르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쓰는 거다. 그래도 단 한가지 알고 있는게 있다면, 그건 [자기 혼자 만의 방]이란 뛰어난 에세이를 남겼다는 거다.2. 울프의 생애 (울프의 생애와 약력은 아마도 기억에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의 많은 부분을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점 밝힙니다. 참고로 위키백과의 버지니아 울프를 참고해도 좋을 듯)  울프는 1882년 1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작가로서는 소설형식에 독창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았으며, 그에 더해 당대 일류의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경험의 끊임없는 흐름, 명확하게 표현하기 힘든 인물성격, 의식을 자극하는 외부환경을 강조했고, 또한 시간을 본질적으로 다른 순간순간의 연속인 동시에 수년, 수세기의 흐름으로 경험하는 방식에 관심을 보였다. 『제이콥의 방』(‘22)과 『올랜도』(’28)은 이러한 그녀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수필「자기만의 방」(‘29)에서는 남성 지배 구조 속에서 여성 작가란 가능한 것인가를 묻고 있으며, 『파도』(’31), 『세월』(‘37), 『막간』(’41)에서는 ‘의식의 흐름’기법을 실험한다. 그녀는 『막간』을 완성한 뒤 정신불안증세가 재발하여 1941년 3월 28일 서식스의 집 부근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3. 자기 혼자만의 방울프를 끌여들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기 혼자 만의 방」에 관한 것이다. 이 에세이를 통해 울프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해석은 누구에게나 자유이고, 울프도 자신의 손을 떠난 그 짧은 에세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한명의 독자로서의 발언권 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나에겐 [자기 혼자만의 방]을 통해서 아직 울프는 살아있다. 내가 울프를 존경하는 이유는 순전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에세이 때문인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방]에서 울프가 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여성이 창작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투표권과 돈―이 두 가지 가운데 돈이 훨씬 중요한 것임을 나는 고백한다”고.울프는 여성과 문학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직접 체험한 구체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녀는 ‘일년에 500파운드’라는 돈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사회가 나에게 통닭과 커피,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엇보다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며 항상 그렇지는 않았어도 아첨하고 알랑거리며 노예와 같이 일을 해야”하는 고[...]



본 시리즈의 두 곡: Ready Steady Go, Extreme Ways

Thu, 27 Dec 2012 11:01:35 +0900

src="http://www.muzrang.com/P01422/embed" frameborder="0" width="500" height="300">



18대 대선 단상: 역사, 그로테스크, 234 vs. 567, 그리고 장수만세

Thu, 27 Dec 2012 10:44:29 +0900

#. 이 글은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한 '슬로우 리스트 3: 대선 결과 단상'에 수록된 (전체에서 일부를 차지하는) 내 글의 퇴고하지 않은 풀버전이다.

1. 오랜만에 대한민국이라는 어떤 기괴한 공동체 전부에 대해 극심한 환멸이 밀어닥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 그런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번 선거는 아주 기괴한 선거였다. 왜냐하면 유령의 선거였으니까. 한 쪽에는 좌절한 개혁가이자 실패한 대통령 노무현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타락한 군인이자 실패한 대통령 박정희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말은 마치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박정희가 이겼다. 노무현의 승리를 역사적인 진전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 의문이지만, 박정희의 승리는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다. 그리고 그 퇴행이 의미하는 슬픔은 우리 공동체가 도달한 가장 강력한 정보 인프라 시대에서 가장 反정보적인 방식으로, 즉 가장 非이성적인 방식으로 대선의 향배가 결정되었다는 절망에 바탕한다. 우리는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 정보 인프라 충만한 시대에 대단히 감정적이고,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빈곤한 선거 과정를 보여줬다. 이것이 내 도저한 절망과 슬픔이 머물고 있는 내 인식의 우물이다.

2. 이번 선거는 234와 567세대간 대결이었다. 퉁쳐서 통신(인터넷) 세대와 비통신 세대의 대결이었다. 인터넷 세대가 졌다. TV와 종이신문이 인터넷을 이겼다. 달리 말하자면 인터넷은 5670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권력에 투항(?)한 MBC, KBS와 장수만세하는 조중동은 5670을 지켜냈다(?). 고전적 권력이론의 성실한 복습편 같다. 권력을 원한다면 미디어를 접수하라.

3. 박근혜 뽑은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말하면, 그 불쌍한 중생들이 '니가 더 불쌍하다'고 바로 내 면전에 대고 침튀며 이야기하겠지만, 박근혜의 정책은 5670(의 대다수 중생들)을 위한 정책인가 생각해볼 때 아마도, 점점 더 가난해지고,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있는 5670을 위한 정책은 거의 확정적으로 아닐 것 같다. 박근혜 찍은 그 손으로 가슴 한번 원없이 쳐보시라. 그 꼴을 기어코 봐주마. 유치한 복수심, 길 못찾은 분노 샘솟는다. 하지만... 다 우리 형제, 부모들이다. 하다못해 이웃사촌이다. 빌어먹을.



[공지] 알라딘 TTB2가 준 선물: 유해사이트 경고 딱지

Thu, 27 Dec 2012 10:39:18 +0900

TTB2 크롬/파이어폭스 접속 장애 안내

안녕하세요. 알라딘 TTB 운영자입니다.

지난 12월 1일경 크롬 및 파이어폭스에서 악성코드 경고 때문에 접속이 안 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연이은 장애 탓에 회원 여러분께 많은 불편을 겪으시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악성코드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고, 구글에서는 현재 안전사이트로 등록된 상태입니다만 그 외 다른 브라우저 및 보안 프로그램에서 악성코드가 있다고 노출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회원님의 블로그나 사이트에서 알라딘 TTB2관련 코드를 잠시 숨김, 처리하시면 회원님의 사이트를 방문하는 크롬/파이어폭스 브라우저 사용자들의 접속 문제는 없어집니다.
악성코드 관련한 사항이 정리되는 대로 서비스 일정 및 관련 내용을 정리하여 재공지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접속 장애에 관련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알라딘 TTB2 운영자 드림



12월 4일에 알리딘에서 보내온 메일이다. TTB로는 한 500원이나 적립했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올려 둔 책들은 대개는 품절이라서, 그냥 이런 책이 좋다는 정보 공유용이지 TTB로 무슨 돈 벌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선물을 주는구먼...; TTB발 유해사이트 경고 딱지가 아직도 파이어폭스(FF)에선 해제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스팸댓글 때문에 짜증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판에, 박그네 빅토리로 짜증에 우울증까지 생기는 마당에, 블로그 다시 살려보자 이러면서 왔는데... ㅡ.ㅡ; 암튼 공지용이다. 크롬에선 진작 해제신청했는데, FF에선 어떻게 해제 신청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 알려주시라.



18대 대선 토론회 팩트체크 정도는 보고나서 투표하자

Tue, 18 Dec 2012 16:54:28 +0900

그런 마음으로 참여했다.
10시간씩 화장실도 안가면서
지난 4, 5일 동안 약속 취소하고, 미뤄가면서 체크했다.  
솔직히 이번 대선처럼 관심이 안 생기는 선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투표는 이를 악물고 기어코 할 생각이다.
투표하러 가기 전에 이런 정도는 읽고 가면 좋겠다.
물론 잘못된 점이 없지 않을거다.
애정어린 비판과 정정을 당부드린다.